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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inema of Korea, Aesthetics of Insight

A Cinema of Korea, Aesthetics of Insight
한국 영화, 통찰의 미학

– 오지 않을 희망을 지치지 않고 갈망하는 인간만이 오늘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늘의 절망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절망을 사랑하는 인간만이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면, 오늘의 절망을 사랑하면 됩니다 –

영화 감독 이준익 LEE Joon Ik
대표작 < 키드 캅 >(1993) < 황산벌 >(2003) < 왕의 남자 >(2005) < 라디오 스타 >(2006) < 즐거운 인생 >(2007) < 님은 먼 곳에 >(2008)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 평양성 >(2011) < 소원 >(2013) < 사도 >(2015) < 동주 >(2016) < 박열 >(2017) < 변산 >(2018) < 자산어보 >(2020 예정)

1987년 영화 마케팅 기획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영화 수입 제작사 씨네월드(주)를 운영하며 < 간첩 리철진 >(1999) < 아나키스트 >(2000) < 달마야 놀자 >(2001) 등 새로운 기획의 대중 영화를 제작해 흥행시킨 동시에 < 벨벳 골드마인 > < 메멘토 > < 헤드윅 > 등 시대를 앞선 예술적 감각의 해외 영화를 한국에 소개했다. 이준익 감독의 감식안과 도전정신이 아니었다면 컬트 영화의 거장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작품이 한국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003년 전쟁 사극의 관습적 통념을 뛰어넘은 < 황산벌 >(2003)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2005년 한국 영화계 최초의 ‘천만 시대극’ < 왕의 남자 >를 연출해 한국 영화계에 시대극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매번 형식과 주제 면에서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며 스크린 안에 그만의 통찰의 미학을 담아내고 있다. 차기작은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되어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흑백 필름으로 그려낸 < 자산어보 >로 2020년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모더레이터 박혜은 PARK Hye Eun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 더 스크린 > 편집장
영화 월간지 < 스크린 >에서 영화 전문 기자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영화 주간지 < 무비위크 > 편집장, 영화 전문 포털 < 맥스무비 > 편집장을 거쳐 2019년부터 컬처 라이프 미디어 그룹 ‘에디토리알 주식회사’의 콘텐츠 총괄 이사(CCO) 및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 더 스크린 > 편집장을 맡고 있다. < 더 스크린 >의 모토는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자극적이고 파편화된 정보가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생태계에서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좋은 질문을 찾고 던지는 일을 하고 있다.

박혜은(이하 박): 올해로 19회를 맞는 ‘KIAF ART SEOUL 2020’ 토크 프로그램에서 미술계 전문가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문가와 대담을 기획한 것은 예술 영역의 교류와 융합, 확장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KIAF ART SEOUL’의 첫 영화 감독 대담으로 이준익 감독님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이준익(이하 이): 반갑습니다. 영화 감독 이준익입니다. 영화 감독으로 KIAF ART SEOUL 2020의 대담에 참여해 ‘한국적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제게도 의미가 큽니다. 예술은 고립이 아니라 연결과 확장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워지니까요. 동시에 현대 미술계의 흐름을 대표하는 KIAF ART SEOUL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박: 한국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인 많은 작품 중에 2000년 이후 가장 ‘한국적 미학’을 성공적으로 발현시킨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 < 왕의 남자 >(2005)입니다. 올해 2020년이 한국 영화 사상 ‘첫 천만 시대극’ < 왕의 남자 > 개봉 15주년이라 더 뜻깊은 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월이 흐르면 나이를 먹는 것처럼 영화가 개봉하고 ‘몇 주년’을 맞는 건 사실 별일은 아닙니다. 다만 < 왕의 남자 >가 개봉한 지 15년이 지난 2020년, 현재의 관객들이 새롭게 영화 속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아 음미해주는 것이 고맙지요. 영화의 수명이란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느냐,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한 가치가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영화들은 좀 유리하죠. 어차피 < 황산벌 >은 1300년 전, < 왕의 남자 >가 500년 전, < 사도 >가 250년 전 이야기예요.(웃음) 출발부터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야기니까요.

박: 시대극의 ‘비밀’이군요. 2020년 하반기 개봉을 앞둔 < 자산어보 >까지 포함해 14편의 연출작 중 시대극이 8편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 가장 가까이는 1970년대 베트남 전쟁시기까지 영화 속 시대의 폭이 광범위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살아남은 이야기라고 해도, 그 이야기를 영상 예술로 구현하는 작업은 매번 새로운 도전이 아닐까요.

이: 구현이 쉽다, 어렵다의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극은 분명 존재했던 ‘과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재에는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역사극 자체가 판타지죠. ‘비현실’적이니까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고증’이 중요합니다만, 영화에서 고증이 목표는 아닙니다. 지금 영화를 보는 현대인의 눈높이와 기대를 충족시키는 ‘감각’으로 채워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요. 660년에 신라와 백제의 명운을 가른 ‘황산벌 전투’를 그린 영화 < 황산벌 >을 예로 들어볼까요. 역사적 문헌도 많지 않지만(웃음), 고증을 바탕으로 아무리 사실적인 전투신을 재현한다고 해도 이미 ‘전투’의 규모와 이미지가 현대 관객들이 요구하는 비주얼과 동떨어져 버립니다. 그 격차를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야 한다는 숙제가 남죠. 고증을 목표로 하되 현대인이 시각적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게끔 재구성, 재해석, 재현해야 하는 거죠. 문화와 문명은 시대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시대극이 제아무리 고증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고증과 일치’할 순 없습니다.

박: 더불어 영화는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구현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한국의 시대극에 집중해 온 이준익 감독에게 ‘한국적 미학’이란 무엇일지 듣고 싶습니다.

이: 제게 한국적 아름다움은 체득된 경험과 이미지의 산물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도시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 우리 전통의 문화를 접하는 일이 일상적이었어요. 제 또래는 학창 시절 소풍이나 사생대회, 백일장은 늘 궁, 왕릉으로 가잖아요. 방학 때 지방의 친척 집에 놀러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잔치하고, 풍물놀이를 즐기는 전통적 농촌 문화를 일상적으로 접했죠. 그렇게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험한 공간, 이미지가 내제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어릴 땐 몰랐어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오히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이니 해외, 강대국의 화려한 문화를 동경하기 쉽습니다. 아시아 문화권에서만 봐도 중국 문화의 웅장한 규모, 일본 문화의 화려한 조형미가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고, 중국 일본뿐 아니라 유럽, 북미 등 전 세계의 문화적 유산들을 다 둘러보고 난 뒤 다시 돌아와 우리의 터를 돌아보니 ‘한국적 아름다움’의 가치가 다시 보이더란 말입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전 세계 유명한 궁과 성을 거의 다 봤어요.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저는 단호하게 ‘창덕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적 가치’를 이야기할 때 한국적 아름다움은 소외되고 배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화 사대주의라는 말보다 저는 ‘착시 현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박: 착시 현상이라는 표현이 신선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홀려 무엇을 잘못 보고 있었던 걸까요?

이: 문화의 근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인 동시에 철학적 세계관입니다. 드러난 외형만 보면 문화적 가치를 판단할 때 착시현상에 빠지게 되죠. 예를 들어 현존하는 문화유산에서 예술과 미학의 결정체로 건축물을 꼽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자본이 풍요로울수록, 그러니까 강대국일수록 더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죠. 과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지나치게 인공적인 건축물로 남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유럽도 마찬가지예요. 동양 문화권에서 본다면 중국의 건축 미학은 자연을 이기려는 인간 의지의 결과물이죠. 일본의 건축 미학은 자연을 극도로 가공하는 데 있습니다. 중국은 인공으로 산을 만들고, 일본은 집 안에 완벽히 가공된 정원을 들이는 식이죠. 그들은 인공의 위대함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인공은 과시욕을 바탕으로 하고, 과시욕은 끊임없이 우열을 가르는 경쟁에서 비롯됩니다. 즉 아름다움에서 인공의 극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조잡한 욕망일 뿐이죠.

그런데 한국의 전통 건축은 전혀 달라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의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히 조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목표를 갖고 도달한 아름다움입니다. 가장 화려한 궁궐에서조차 담 밖의 풍경을 해치지 않고 담 안에서 향유하도록 만드는 시선의 겸손함을 내재하고 있어요. 인간이 가장 지혜로운 순간에 선택하는 태도, 그중 으뜸이 겸손입니다.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시선과 태도, 철학이 섬세하게 정제되어 있습니다. 단연 선진적이죠. 다행스러운 점은 이제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선진사회에 접어들면서, 한국적 아름다움의 선진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겁니다. 우리의 눈높이가 높아졌으니, 이제야 ‘이미 훌륭했던 것’을 알아보는 셈이죠. 온 세상의 보물을 찾아 헤매다가 돌아와서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니 그 자리가 보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죠.

박: 한국 영화계도 사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 관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영화 시장 규모가 커지던 시기지만, 당시 ‘사극’은 소위 비인기 장르였죠. 흥행작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한국적 아름다움’이라는 보물을 다시 만난 계기가 2005년 <왕의 남자>입니다.

이: 감사히도 ‘아름답다’고 평을 받는 영화지만, 저는 아직도 <왕의 남자>를 잘 못 봅니다.(웃음) 제가 보여주고 싶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극진하게 재현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서 정말 아쉽죠.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허름한 궁궐 세트에서 촬영했어요. 자세히 보시면 기와도 가짜, 단청도 종이로 인쇄해서 붙여 놓은 가짜, 가벽을 겨우 세워 놓은 세트장입니다. 가끔 TV에서 <왕의 남자>를 방영하면, 그런 장면이 보일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돼요.(웃음) 실제 창덕궁, 인정전, 돈화문 같은 문화 유적에서 촬영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재현한 시대극 전문 세트장이 필요한데, 2020년인 현재도 그런 촬영 공간은 없습니다. 시대극, 역사극을 만드는 영화인들의 공통 고민이죠.

박: <왕의 남자> 촬영 현장은 저도 직접 현장을 취재했기 때문에 기억이 선합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왕의 남자>가 한국 영화 사상 첫 ‘천만 사극’이 되면서 한국 영화계에 사극 전성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2015년 사도세자와 영조의 비극을 그린 <사도>를 촬영할 땐 훨씬 사정이 나아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이: <왕의 남자>와 <사도>는 같은 세트장입니다.(웃음) 10년 사이에 제작비 규모는 커졌지만, 미술 관련 예산은 변한 게 별로 없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미술적 완성도를 높일 세트장을 보유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영화 선진국’이라 부르는 기준 중 하나가 시대극입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영화로 ‘시대극’을 만드는 나라가 손에 꼽습니다.

한두 편 만드는 걸 넘어서, 하나의 ‘장르’로 불릴 만큼 완성도와 규모를 갖춘 작품들이 매년 양산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나라의 문화 산업의 선진성을 반영하는 지표가 됩니다. 제작비 규모가 크기도 하고, 자국의 역사에 관한 다양한 관점, 이야기, 아름다움을 찾는 시도가 지속된다는 의미니까요. 역사적 지식수준도 높아져야 하고요. 역사와 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신분 사회의 인물이 갖는 딜레마를 공감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근거나 지식 체계 없이 접근하면 그야말로 ‘판타지’가 되어버리니까요.

박: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이: 사실 시대극은 ‘영화 미술’의 결실이고, 의상이 곧 주인공이죠. 오죽하면 시대극을 ‘코스튬 필름(Costume Film)’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시대극은 신분 사회가 배경이기 때문에 의상 자체가 그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미술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왕의 남자>와 <사도>는 모두 조선 시대가 배경이고, 심지어 같은 세트에서 촬영했지만 미술 콘셉트가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 <왕의 남자>는 연산군 시대, 1504년 조선 전기죠. 1392년 성리학을 기반으로 새로운 조선 왕조가 시작됐지만, 고려 시대에서 이어져 온 화려함이 남아있던 시기입니다. 반면 영화 <사도>는 영조 즉위 38년인 조선 후기, 1762년이 배경입니다. 영조는 정책적으로 사치를 금하는 왕이었습니다. 두 시대의 미술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죠. <왕의 남자> 때는 ‘더하기’의 미술입니다. 의상, 공연, 연회, 도구, 휘장 모두 가능한 색과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반면 <사도>의 미술은 ‘빼기’입니다. 소품, 색, 공간, 인물도 다 빼고 최소한만 남기는 식입니다. 조선 전후기의 역사적 차이를 알아야 미술이 미술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박: 또 한 가지, 이준익 감독의 시대극 구성의 특징은 극과 극의 만남입니다. <황산벌>은 장군과 민초 병사, <왕의 남자>는 왕과 광대, <사도>는 왕과 폐위된 세자가 부딪힙니다. 극과 극의 부딪힘에서 오는 파열의 에너지도 강렬하지만, 미술적으로는 한 시대의 미술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게 특징입니다.

이: 시대극에 사회상을 담으려면 계급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함께 보여줘야 하니까요. 상층과 하층의 간극도 중요하지만, 동시대의 동질성을 바탕에 깔고 신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신분의 차별성만을 강조하면 동시대의 동질성에서 벗어나고, 동질성만 강요하면 신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편차가 미진해집니다. 동질성과 차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선 미술에서 형태와 색과 질감을 포괄적으로 조율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훌륭한 미술 감독, 의상 감독, 분장 감독 등 전문가가 그 디테일을 만들지만, 감독도 전체를 보는 눈을 가져야 영화 한 편의 복합적 요소를 일관성을 갖고 조합할 수 있습니다.

흔히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가 합쳐진 ‘매커니즘의 종합 예술’이라기 보단, ‘선택점의 풍부성’ 때문에 ‘종합 예술’이라고 일컬어진다고 봅니다. 한 컷 안에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포함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 그게 정말 종합적이죠. 그 결정을 미술, 음악, 건축, 무용, 문학, 의상 등 총체적으로 구현해내는 일. 특히 시대극은 선택점의 풍부성이 무한대죠.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현재의 생태계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그 자체가 현재를 반영하기 때문에 ‘뭔가를 더하면’ 이상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역사극, 시대극은 ‘뭔가를 안 하면’ 다 이상해져요.(웃음) 인물의 말투와 움직임은 물론이고, 숟가락 하나, 신발 한 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전부 싹 다 ‘만들어야’ 합니다. 종합 예술의 고통이자 즐거움이죠.(웃음)

박: 최근 작품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미술적 특징이 눈에 띕니다. <동주>로 첫 흑백 영화를 연출했는데, 2020년 개봉을 앞둔 <자산어보>도 흑백 영화입니다. 점차 간결하고 단순해지고 있죠.

이: 그렇군요. 색이 빠지고 있었네요. 그런 방향으로 가겠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동주>를 첫 흑백 영화로 만든 건 예술적 시도가 아니라 상업적 목표였습니다. 영화는 짧은 기간에 큰 자본이 필요한 공동 작업입니다.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려있죠. 그런데 감옥에서 이른 생을 마감한 일제 강점기의 젊은 시인의 이야기는 ‘상업성’이 없잖아요.(웃음) 시인이 주인공인데, 상업성을 위해서 총 쏘면서 뛰어다닐 일도 없고요. 하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였고,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흑백을 선택한 건 미술이 채우지 못한 영역을 숨기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의도치 않게 미적으로도 담백해진 겁니다.(웃음) 전혀 예상치 못한 성취죠.

하지만 늘 예술에서 제약과 한계는 돌파구가 되어줍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사례가 얼마든지 있죠. 저의 사례는 아니지만,(웃음) 열악한 조건에서 작품 안에 빛나는 예술가의 영혼이 담겼을 때, 그 영혼이 식지 않고 이어져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풍요와 사치로 빚어낸 건 예술이 아니라 ‘장식’이라고 하잖아요. 장식은 예술에서 시작됐지만, 치장과 가공의 영역이죠.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장식과 예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가장 치열하게 피 튀기는 삼국시대의 전쟁터에서 출발해 조선의 슬픈 궁궐을 지나, 일제 강점기 청춘의 초상을 거쳐 <자산어보>라는 파도 소리만 가득한 유배지 흑산도에 도착했다는 점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이: 어느 순간, 덜어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기점을 따지자면 <사도>군요. 그전에는 보태기만 했어요. <사도>에선 왕의 이야기에서 장식을 덜어내고, <동주>에서는 색을 덜어내고, <박열>에서는 볼거리를 덜어냈죠. 이야기의 선명성을 유지하려면, 선명성을 간섭하는 잡스러운 것들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다가 <변산>은 관객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했는데, 덜어내는 걸 잊었던 거죠.(웃음)

차기작 <자산어보>는 처음부터 덜어내고 시작하는 이야기예요. 보통 상업 영화는 인물의 행동, 활약상을 그려야 하는데, <자산어보>는 작은 섬에 유배된 선비의 정신세계에 관한 영화예요. 책 쓰는 사람에게 무슨 ‘행동의 활약상’이 있겠어요. 그보단 자연과 마주하면서 성찰하는 조선 선비의 고아한 품격을 구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박: 짧게나마 본 <자산어보>의 흑백 영상이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특히 바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기분이었어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연’에 집중한 영화는 <자산어보>가 처음입니다.

이: 최고죠. 제가 너무 큰 축복을 받았어요. 흑산도가 배경이고, 인근의 도초도와 비금도, 자은도 등에서 촬영했습니다. 사실 자연이 허락지 않으면 촬영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자산어보> 촬영하는 3개월간, 자연이 그 아름다움을 다 담도록 허락했어요. 이렇게 큰 복을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류승룡, 조우진, 김의성 배우가 촬영장에 오면 집에 가기 싫어했어요.(웃음) 일터에서 힐링하는 기분이라고.

박: 예술가로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마주한 첫 작업, 그 감흥이 궁금한데요?

이: 자연 앞에선 겸손해지죠.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걸 단번에 알게 됩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도시 속에서는 인간이 만든 인공, 문명에 현혹되어서 오만해집니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서 자연 속에서 자연의 매혹을 몇 번만 경험하고 나면 겸손해져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작은 지구에서 오만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되죠.

요즘 ‘캠핑’이 대세이고, 젊은 세대도 ‘등산’이 취미라고 들었습니다. 고도성장의 산업사회에서 탈자연주의에 지친 현대인들이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이 커지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정리한 것처럼, 인류 문명은 자연과 인공의 교환 조건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현재는 인공의 급진성이 너무 지나친 상황이죠. 자연을 괴리시켜야만 인공의 편리성이 증가하잖아요. 그 결과 현대인들은 열지 못하는 창문을 가진 고층 아파트,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자연과 지나치게 괴리되어 있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저는 그래서 사람들이 캠핑을 가고 등산을 가고 낚시를 간다고 여깁니다. 살기 위해서, 살려고 자연 근처로 움직이는 거죠. 집단 무의식의 흐름인 것 같아요.

박: 비우고, 덜어내고, 자연과 마주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담은 <자산어보>가 더 기다려집니다. 한 편으로 저는 ‘영화’라는 예술은 결국 대중 관객에게 자신이 완성한 ‘아름다움’을 설득하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준익 감독에겐 어떤 지향점이 있을지요.

이: 제겐 ‘설득’의 욕망이 없습니다. 다만 ‘설명’의 욕망이 있죠. 전 ‘설득’이 그리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득의 의지를 가진 사람은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엔 설득이 큰 무기였죠. 연설하고, 주장하고, 논리를 펴고 내게 ‘동의하게’ 만듭니다. 대신 설명을 잘해서 상대가 이해하고, 이해하면 교감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요. 제 영화도 ‘설득’이 아닌 ‘설명’이라는 방법을 통해 공감하려는 작업이예요. 예를 들면 ‘신파’는 설득하려는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모정입니다! 이것이 애국입니다! 라는 식이죠.

물론 설득이 그 사회가 갖는 집단적 강박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순 있어요. 하지만 ‘신파’로 한번 집단 강박을 해소하고 나면, 그다음에 누군가 똑같은 방식으로 설득하려 들면 외면해요. 더 이상 한국 영화에서 ‘신파’라는 요소가 통하지 않는 이유죠. 현대는 설득이 아닌 설명의 시대, 동의가 아닌 공감의 시대입니다. 내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잘 설명하는 영화를 만들어야죠.

박: 그럼 이준익 감독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요.

이: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는 인간의 뒷모습보다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자연은 본래 아름다운 것이라, 자연 더러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죠. 자연이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평가받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웃음) 대신 전 평범한 사람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마주하고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그 뒷모습에서 감동을 받고 영감을 얻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잖아요. 하나의 세계가 자신이 마주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특히 그 뒷모습은 아름답죠.

박: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준익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군요.

이: 그런가요. 일견 제 영화들이 삶의 비극을 그리는 것 같지만, 전 희망을 갈구하는 인간만이 절망에 맞설 수 있다고 여깁니다. 희망이 구체적이지 않다면 절망을 피하려고만 들겠죠. 절망을 피하고자 하면 오늘과 마주 설 수 없습니다. <소원>은 절망의 늪에 빠진 가족이 희망을 바라보며 절망을 이겨내는 날들을 그립니다. <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어간 젊은 청년의 비극적 삶을 그렸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과 바람과 시’를 읊는 젊은 시인의 얼굴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왕의 남자>도, <라디오 스타>도 바뀌지 않을 절망 속에서도 구체적 희망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희망’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에 ‘희망’일 수 있는 거죠.

박: 굉장히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희망을 갈구하는 절망한 인간의 이야기인데, 왜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걸까요?

이: 오지 않을 희망을 지치지 않고 갈망하는 인간만이 오늘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늘의 절망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절망을 사랑하는 인간만이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면, 오늘의 절망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영화 속 인물들은 ‘행복한’ 인간인 거죠.

동시에 ‘열등감’과 마주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모든 감정은 상대적인 열등과 우월 안에서 생겨납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내가 세운 기준에 나보다 낫거나 못하거나, 둘 중 하나죠. 그럼 우월과 열등, 두 감정 중에 더 ‘우수한 감정’은 무엇일까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극복하려는 의지로 이어지죠. 오늘의 절망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반대로 인간이 ‘우월감’에 빠지는 순간 무너집니다. 발전할 수 없어요. 저는 앞으로도 절망을 사랑하고, 열등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이야기를 영화로 그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제겐 그들이 가장 아름다우니까요.

박: 영화와 미술, 예술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준익 감독님, 오늘 대담 함께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저도 즐거웠습니다. 직접 예술과 미술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또 좋은 기회가 생기길 바랍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술과 관객이 만나는 자리가 위축되고 있는 요즘, 비대면 아트 페어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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